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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처음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DC 코믹스의 빌런 기원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배트맨의 숙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프리퀄 같은 것이요. 그런데 막상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는 그런 기대가 완전히 빗나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조커(2019)는 코믹스 세계관을 거의 활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나 킹 오브 코미디를 떠올리게 하는, 사회에서 밀려난 한 인간의 내면 붕괴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 붕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세 가지 장치, 즉 계단, 광대 분장, 그리고 아서의 웃음소리를 중심으로 이 영화를 다시 들여다보려 합니다.
고담의 계단이 말하는 것
이 영화에서 계단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아서 플렉이 매일 힘겹게 올라가는 브롱크스의 계단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짊어진 무게를 시각화한 공간입니다. 무거운 광대 소품을 들고 비좁은 계단을 오를 때, 카메라는 그를 아래에서 올려다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옆에서, 혹은 뒤에서 따라붙습니다. 관객이 그를 동정하거나 영웅화하기 전에 그냥 옆에 있게 만드는 구도입니다. 저는 이 선택이 꽤 의도적이라고 봤습니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아서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도 의도적으로 피합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같은 계단이 다시 등장했을 때, 저는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서가 이제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옵니다. 올라갈 때는 무겁고 느렸던 동선이 내려올 때는 가볍고 음악적입니다. 게리 글리터의 Rock and Roll Part 2가 흐르면서, 그 계단은 억압의 공간에서 해방의 무대로 뒤집힙니다. 처음에는 이 장면이 불편했습니다. 분명히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난 직후인데, 화면은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거든요. 그 불편함이 바로 이 영화가 의도한 감각이라는 걸 나중에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관객이 아서에게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게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광대 분장이 지워지고 다시 그려지는 과정
아서가 일하는 광대 분장은 영화 내내 지워지고 다시 그려집니다. 초반에 그가 거리에서 폭행당하는 장면에서 분장은 엉망으로 번집니다.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건 분장이 단순히 직업의 상징이 아니라, 아서가 세상에 내보이는 얼굴이 얼마나 쉽게 훼손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웃는 얼굴을 직업적으로 강요받고, 그 얼굴은 폭력에 의해 무너집니다.
반면 후반부에 아서가 스스로 분장을 다시 하는 장면은 질감이 완전히 다릅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천천히, 의식적으로 분장을 완성하는 그 장면은 거의 의례처럼 연출됩니다. 조명도 달라지고, 음악도 달라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긴장감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폭력이 일어나는 장면이 아닌데도요. 아서가 아서를 지우고 조커를 완성하는 그 전환이, 분장이라는 물리적 행위를 통해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표현됩니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 장면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표정과 손동작만으로 내면의 변화를 전달하는데, 이건 정말 쉬운 연기가 아닙니다.
웃음소리라는 증상, 그리고 오해
아서는 감정과 무관하게 웃음이 터져나오는 신경학적 증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걸 초반부터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그가 버스 안에서 아이를 웃기려다 발작적으로 웃음이 터지는 장면, 지하철에서 웃음을 억누르려다 오히려 더 크게 웃어버리는 장면, 이 모든 순간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위협적으로 느끼거나 조롱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설정이 영화 전반에서 꽤 정교하게 활용된다고 봤습니다. 아서의 웃음은 그가 원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는 슬플 때도 웃고, 두려울 때도 웃고, 화가 날 때도 웃습니다. 그래서 그의 내면을 읽으려면 웃음 자체가 아니라 웃음 뒤의 눈빛을 봐야 합니다. 호아킨 피닉스가 이 눈빛 연기를 얼마나 세밀하게 조절하는지가, 이 영화의 연기적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아쉬웠던 점은 이 웃음 증상이 후반부로 갈수록 서사에서 점점 희석된다는 것입니다. 초반에는 아서의 통제 불가능한 상태를 드러내는 장치였는데, 그가 조커로 변해가면서 웃음이 오히려 의도적인 표현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의도된 변화인지, 아니면 연출의 일관성이 흔들린 건지 저는 여전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 오히려 이 캐릭터의 불안정성을 강조한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머레이 프랭클린 쇼 장면이 불편한 이유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하는 토크쇼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과의 대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입니다. 아서가 생방송 중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긴 독백을 하고, 이후 극단적인 폭력이 벌어집니다.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저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하나는 이 사람이 드디어 세상에 말을 하고 있다는 이상한 해방감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해방감을 느끼는 제 자신에 대한 불쾌함이었습니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관객을 아서의 시선 안으로 끌어들인 뒤, 그 위치가 어디인지를 갑자기 인식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비판적으로 보면, 이 장면은 영화가 아서의 폭력을 지나치게 극적으로 연출해 카타르시스처럼 느껴지게 만든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저도 이 비판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지 않습니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이 장면의 감정적 무게를 의도했다면, 그 의도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불편함을 관객에게 남기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목적이라는 반론도 있고, 저는 후자 쪽에 조금 더 기울어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그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남는다면, 단순한 오락 영화는 아닌 셈이니까요.
이 영화가 불편하게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한계
조커는 관객을 편안하게 두지 않으려는 영화입니다. 그 전략은 상당 부분 성공합니다. 아서를 완전한 피해자로도, 완전한 악인으로도 그리지 않는 균형이 영화 내내 유지됩니다. 그가 저지르는 폭력은 분명히 폭력이고, 그 폭력을 유발한 사회적 조건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화면에 올려두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전략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한계도 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특히 고담 시내의 폭동 장면은 개인의 심리 드라마에서 갑자기 사회적 반란 서사로 전환되는데, 이 전환이 다소 급합니다. 아서의 이야기와 고담 시민들의 분노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영화가 충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아쉬운 지점이었습니다. 개인의 붕괴를 추적하는 서사가 갑자기 집단적 상징으로 확장될 때, 그 연결고리가 너무 느슨하게 처리된 느낌이었거든요. 이런 분들에게는 다소 호불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심리 묘사의 밀도를 기대했는데 후반부가 스펙터클로 기울어진다고 느끼는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이 모든 한계를 상당 부분 메웁니다. 그는 아서의 신체 언어를 완전히 다시 설계한 것처럼 보입니다. 걸음걸이, 어깨의 각도, 숨을 쉬는 방식까지 모두 이 캐릭터에 맞게 조정되어 있습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이 단순히 화제성 때문이 아니라는 걸, 영화를 보면 납득하게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결론 — 불편함을 남기는 영화의 가치
조커(2019)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하고 내밀한 영화였습니다. 폭발적인 액션이나 화려한 빌런 변신 서사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계단, 분장, 웃음소리라는 구체적인 장치를 통해 추적하는 데 있습니다. 그 추적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이 어느 순간 아서의 편에 서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고, 그 발견이 불편합니다. 저는 그 불편함이 이 영화가 남기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반부 서사의 급격한 확장과 폭동 장면의 연결이 다소 느슨한 점, 웃음 증상의 활용이 후반부에서 일관성을 잃는 점은 분명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와 계단·분장·웃음이라는 세 가지 장치의 일관된 활용은 이 영화를 단순한 빌런 기원 이야기 이상으로 만들어줍니다. 심리 드라마와 사회 비판에 관심이 있는 분들, 또는 배우의 신체 연기가 얼마나 서사를 이끌 수 있는지를 보고 싶은 분들에게 강하게 추천합니다. 반면 DC 히어로 세계관의 연장선을 기대하거나, 명확한 결말과 도덕적 정리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호불호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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